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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태어난 조르주 마티유는 구상의 제약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서정적 회화 양식을 선도한작가 중 한명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파리가 예술적 혼란과 격변을 겪던 시기에 마티유는 실증주의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기하학적 추상의 유행을 단호히 거부하며 새로운 움직임을 일구었다. 평론가들에 의해 뜨거운 추상, 앵포르멜, 타시즘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일컬어진 이 운동은 근대 미술에 지대한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마티유와 동료 작가들은 발전하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유토피아적 찬양 대신,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함을 목도하며 시대에 대한 환멸의 감정을 개인적 시각에서 표현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내적 탐구와 자기 성찰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창작의 길을 열었고, 마티유는 그 기류의 중심에 있었다.
마티유는 1944년, 그가 회화의 ‘마지막 제약’이라 여기던 형상화로부터 해방을 선언하고, 자신만의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1946 년부터 그의 작품에는 단색조의 홀연한 평면 위에 손가락이나 천, 또는 물감 튜브로 직접 바른 그물망 형태의 선들이 나타난다. <Siranday>(1967)와 같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형태는 과감한 제스처가 교차하며 서로 엮인 결과로, 작가의 창조적인 혁신을 잘 보여준다. ‘튜비즘’이라고도 불렸던 이 양식은 마티유가 필수적이라고 여긴 빠른 속도와 에너지로 제작 되었으며, 이를 통해 재료와 거의 육체적인 관계를 맺게된다.
초현실주의와 더불어 자동기술법, 무의식과 관련한 당대의 발견을 영감으로 삼아, 마티유는 예술을 자신의 내면을 지각 가능한 형태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창조적 환희와 자멸적 폭력 사이를 교차하는 인간 심리의 본질적 갈등은 마티유의 캔버스 위에서 흔연한 얼룩, 피를 연상시키는 흘림, 화산처럼 뻗어나가는 형상 등의 조형 언어로 표현된다. 예술적 매체를 통한 원초적 충동의 이러한 해방은 결국 냉전으로 발전한 새로운 세계대전과 핵전쟁의 위협으로 점철된 전후 시대의 극심한 충격에 대한 카타르시스적 주술 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1947년부터 마티유는 ‘누벨 에콜 드 파리(Nouvelle École de Paris)’의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다. 화가로서의 작품 활동 외에도, 그는 예술 평론가와 이론가로 활동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동료 작가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기하학적 추상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마티유는 저명한 예술 평론가 미셸 타피에와 함께 다양한 ‘전투 전시회’를 주도하여, 까미유 브라이언, 장 포트리에, 한스 아르퉁, 장 폴 리오펠, 볼스 등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고, 그 외 많은 작가의 작품을 조명했다. 1951년 니나 도세 갤러리에서 개최된 《격정의 대결(Véhémences Confrontées)》 전은 당시 파리의 미술계에 새로운 추상 언어를 정착시켰다. 이 전시를 통해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프랑스의 신추상주의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대결을 펼쳤으며, 이는 파리와 뉴욕의 신흥 미술계가 교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자유는 공허하다(La Liberté, c’est le vide)>는 예술에 관한 마티유의 첫 에세이로, 1948년 콜레트 알렌디 갤러리에서 열린 《H.W.P.S.M.T.B.》전의 도록에 수록되었다. 에세이에서 작가는 서정적 추상을 ‘페인팅의 행위에 대한 현상학’으로 정의하였다. 그는 일생에 걸쳐 창작의 순간 기표가 기의에 선행해야 한다는 ‘기표로서의 예술’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회화는 존재하기 위해 재현할 필요가 없다” 대신, 마티유의 조형 언어는 직선, 십자, 고리, 얼룩 모양을 포함한 다중의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다.
기호를 해방시키기 위한 탐구에 이끌린 조르주 마티유는 이후 십 년가량을 자신을 매료시킨 동양 예술을 연구하는 데에 전념했다. 이번 전시작 중 하나인 <Celadon>(1970)은 3-4세기 중국에서 흔히 제작된 청자를 뜻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서예의 유서 깊은 전통을 추상화와 연관지었다. 동서양 간의 이러한 연결은 쥬린 박사와 서예가 장대천과의 대담을 바탕으로 한 그의 에세이 <서정적 비구상적 회화와 중국 서예 간 특정 측면에서의 관계성>(195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동양의 고대 예술과 유럽 회화의 융합’을 이루고자 했다. 서예의 핵심인 속도와 과감함은 무아지경에 가까운 창작의 상태를 통해 이루어지는 마티유의 회화 작업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품 <Chambly>(1965)에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반복적인 검은색은 동양 미술의 묵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화면의 중앙에는 검은 선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가상의 표의문자가 흙색 배경과 대비되어 두드러져 보인다. 이는 저술가 앙드레 말로가 1950년 르네 드루인 갤러리에서 열린 마티유의 개인전을 보고 남긴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마침내, 서양의 서예가로군!”
1950년대를 지나며 마티유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성공은 1956년에서 1962년 사이에 독일,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브라질, 캐나다, 미국, 이스라엘, 레바논, 영국,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기 위해 떠난 일련의 여행들 덕분이었다. 마티유는 여행 중 작업 과정과 자신의 모습을 대중에게 극적으로 선보이는 창작 세션을 여러 차례 기획했다. 1954년 그가 사진작가들과 영화감독들 앞에서 불과 두 시간 만에 제작한 <La Bataille de Bouvine> 은 춤추듯 달려들어 캔버스를 포옹하는 작가의 고양이처럼 날렵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195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기모노를 입고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이 작품은 현재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마티유는 미국의 앨런 캐프로가 ‘퍼포먼스’라는 개념을 창시하기 몇 년 전부터 이미 퍼포먼스 아트와 해프닝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셈이다.
후기작에서는 특히 작가의 뛰어난 색채 사용이 드러난다. <Forez>(1970), <Tamatia> (1979), <Datura>(1980) 같은 작품은 짙은 카드뮴 레드부터 노랑, 마젠타, 황토색, 빛나는 옅은 하늘색까지 아른거리며 폭넓은 색채의 풍성함으로 가득 차 있다.
중세 시대 저명한 교황의 이름을 딴 작품 <Innocent III>(1960)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의 예술적 성숙은 영성의 성장으로 특징 지어진다. 마티유의 작품세계는 점차 혼합주의적 범신론으로 진화해, 1980 년대에는 ‘우주적 전환’ 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점에 이른다.
운영
· 화~토요일 10:00~18:00
· 일요일 휴관
· 무료 |
문의
· +82 (0)2-545-7978 · seoul@perrotin.com |
참여
· 작가: 조르주 마티유 (Georges Math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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